scribble

MIND LOG(내마음의 항해일지)

About life-LOG Email Topica Newsletter Ontology

06 Apr 2026
다시, 한 줄 #08 | 돌아간 길이 지름길이 되는 순간

다시, 한 줄 대표 이미지


첫 직장은 호텔이었습니다.

구매, 자재, 회계, 인사. 화려한 로비 뒤편에서 숫자와 서류와 사람을 다루는 일이었습니다.

식자재 단가를 맞추고, 재고를 세고, 급여를 정산하고, 퇴직자 서류를 처리했습니다.

스물다섯 살의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게 나의 커리어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 뒤로 스타트업으로 갔습니다.

작은 팀에서 모든 걸 해야 했습니다. 기획도, 운영도, 숫자도, 사람도.

PR 회사에서는 말의 무게를 배웠습니다. 한 줄의 메시지가 브랜드의 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콘텐츠 에이전시에서는 이야기의 구조를 배웠습니다. 사람들이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 어디서 오는지를.

광고와 이커머스 마케팅 에이전시에서는 숫자가 이야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클릭률, 전환율, ROAS.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판단하는 습관을.


돌이켜보면, 하나도 계획된 길이 아니었습니다.

호텔에서 스타트업으로, 스타트업에서 PR로, PR에서 콘텐츠로, 콘텐츠에서 광고로.

이력서만 보면 방향을 못 잡은 사람처럼 보였을 겁니다.

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AI 시대가 왔습니다.

그리고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경험들이 하나씩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호텔에서 배운 운영 감각은 시스템을 설계할 때 살아났습니다.

스타트업에서 익힌 “일단 만들어보자”는 태도는 프로토타입을 빠르게 돌리는 힘이 되었습니다.

PR에서 다듬은 메시지 감각은 AI에게 정확한 지시를 내리는 프롬프트가 되었습니다.

콘텐츠 경험은 스크립트와 영상의 뼈대가 되었고, 마케팅 데이터 습관은 성과를 읽는 눈이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AI 에이전트와 함께 여러 가지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있습니다.

유튜브 영상을 자동으로 만드는 시스템, 경쟁사 포지셔닝을 추적하는 대시보드, 트렌드 시그널을 수집하는 도구, 그리고 이 뉴스레터까지.

하나하나가 과거의 경험 위에 서 있습니다.

운영을 몰랐다면 자동화를 설계할 수 없었고, 콘텐츠를 몰랐다면 영상의 흐름을 잡을 수 없었고, 마케팅을 몰랐다면 뭘 측정해야 하는지 몰랐을 겁니다.


AI는 코드를 짜줍니다. 이미지를 만들어줍니다. 글도 써줍니다.

하지만 무엇을 만들지, 왜 만들어야 하는지는 AI가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 판단은 경험에서 옵니다.

수많은 현장에서 부딪히고, 실패하고, 돌아가고, 다시 시작하면서 쌓인 감각.

그것이 AI 시대의 진짜 경쟁력이라고 요즘 매일 느끼고 있습니다.


커리어가 이상하게 꼬여 있다고 느끼시는 분이 있다면,

한 가지만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경험들은 사라진 게 아닙니다. 아직 연결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연결되는 순간은 생각보다 갑자기 옵니다.


오늘의 다시, 한 줄

쓸모없어 보였던 경험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순간, 그것이 당신만의 무기가 됩니다.


호텔 뒤편에서 재고를 세던 스물다섯 살의 저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고. 지금 AI와 함께 프로토타입을 만들 때마다, 과거의 모든 경험이 하나씩 소환됩니다. 운영, 메시지, 콘텐츠, 데이터. 돌아간 길이 결국 지름길이었습니다. 커리어에 정답은 없지만, 쓸모없는 경험도 없다는 것을 이제는 확신합니다.


손병구 at 00:00

이 글이 좋았다면 공유해주세요

댓글

의견 남기기

댓글은 검토 후 게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