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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 LOG(내마음의 항해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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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Apr 2024
메모의 이유|현재와 미래를 움직일 수 있는 힘

일본 드라마 중쇄를 찍자(2016)에서 코믹 영업부장 오카에이지는 연도별 수첩에 기록한 메모를 통해 주요 의사결정을 한다. 과거의 경험들이 현재의 시행착오를 줄인다. 이 기록은 개인적 활용에만 그치지 않고 후배를 이끌고 팀에게도 영감을 주는 도구로 활용된다. 메모가 당시의 행위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와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극을 받았다.

메타인지(metacognition)라는 개념이 있다. 단어 그대로 인지의 인지, 즉 인지 위에 인지를 얹는 것을 의미하며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생각해본다는 개념이다. 메모를 하는 행위는 내가 인지한 상황을 기록하는 것으로 기억 속에 각인하는 효과가 있다. 복기하기 위해서 메모를 한다. 기록을 복원하고 해당 메모가 작성될 시점의 느낌과 생각과 기분을 떠올리는 것으로 생각의 확장을 이룰 수 있다. 물론 버려지는 아이디어 덩어리도 있다. 당시에는 번뜩이는 생각이었지만 복기 과정에서 수명이 다했거나 쓸모가 없어지는 메모가 이에 속한다.

모바일이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늘 곁을 떠나지 않고 붙어있는 디바이스를 활용해 기록할 때가 많다. 검색이 용이하고 바로 PC에 접속해서 옮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수많은 내용 중에 옥석 가리기가 쉬운 것만은 아니다. 물리적으로 수첩을 넘기는 사각거림과 종이에 붙어있는 기록의 냄새도 없다. 희소성이 덜하기 때문에 쉽게 버려지는 전단지 마냥 기억에서도 쉽게 잊힌다.

언제 어디서나 메모할 수 있도록 2개의 수첩을 활용한다. 하나는 포켓 메모 수첩으로 한 손에 거머쥘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지나 상위 주머니 어디라도 쏙 넣을 수 있는 크기다. 날짜를 적고 생각나는 대로 펜 가는 대로 메모하기 편한 크기와 재질의 수첩이다. 또 하나는 몰스킨 수첩을 쓴다. 포켓 수첩에서 가려낸 옥석을 정자로 가지런히 기록한다. 한 권이 완성되면 몰스킨에 기록된 문자들은 다시 PC로 옮겨온다. 이 과정에서도 키보드로 타이핑하는 행위가 이어지기 때문에 또 한 번의 메타인지 과정이 진행되는 셈이다.

메모 과정에 있어서 펜도 중요하다. 고가는 아니지만 종이와 마찰을 일으킬 때 사각사각 미끄러지는 촉감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만년필을 쓴다. 펜을 잘 잃어버리는 습성으로 비싼 펜보다는 잃어버려도 자책이 덜한 저가 만년필을 주로 쓴다. 몰스킨 수첩을 열 권 정도 완성하면 내게 주는 선물로 진짜 만년을 쓸 수 있다는 만년필의 기원을 실천할 수 있는 펜을 구매하려고 한다.

가장 많은 빈도를 보이는 메모의 카테고리는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Todo 리스트에 넣기 전에 머릿속에 떠오를 때마다 기록한다. 물론 일자별로 시간 별로 알림이 필요한 메모는 모바일 일정관리 앱으로 다시 옮겨 담는다. 책을 읽을 때 가장 높은 빈도로 발생하는 아이디어는 키워드나 단문 단위로 기록한다. 하나의 키워드가 확장되어 아이디어를 발전시킬 때도 있고 카피나 콘셉트의 당위를 설명하는 글로 확장되기도 한다. 그날의 경험 중에서 다시 곱씹어 보고 싶은 감정들도 남긴다. 운이 좋으면 해당 메모에서 에세이 한편이 전개되기도 한다. 회의 과정에서 떠오르는 생각들도 낮은 빈도긴 해도 빼곡히 적힌다.

현재의 생각, 미래를 위한 인사이트, 과거의 방법론이 한데 뒤엉켜 수첩 곳곳에 기록된다. 그중 미래의 나와 상호작용할 가능성이 높은 기록은 쓰고, 생각하고, 돌아보고 활용한다. 가끔은 생경한 기록과 마주할 때도 있다. 예사롭지 않은 마음속의 느낌, 머릿속에 생각이 과연 내가 쓴 메모가 맞는지 헷갈릴 정도로 낯설 때가 있다. 오늘날 나를 구성하는 8할은 과거에 대한 복기와 반성에서 비롯된다. 메모는 단지 기억하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와 상호작용하기 위한 도구이자 방법이다.

메모는 라틴어로 메모로(memoro)에서 기원을 찾는다. ‘반드시 기억돼야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기억에만 머물러 있기보다는 현재를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 메모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우리 뇌를 자극해서 영감을 불러온다. 그런 의미에서 메모는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를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이다. 기록하고 생각하고 돌아보고 활용하고, 시간대는 다를지언정 나와 끝없이 만나는 과정이자 결과이다.


손병구 at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