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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 LOG(내마음의 항해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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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Dec 2013
겸손

포켓볼 당구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에 수지 250을 찍을 정도로 당구에 자신이 있었고, 포켓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포켓볼 실력도 나쁘지 않았다. 간혹 포켓볼을 배우고 싶어하는 손님들이 찾아오면 기초부터 상세하게 교습해주는 은근 인기있는 알바생이었다.

어느날 바람이 몹시불던 겨울, 한 여자분이 당구장을 찾아왔다. 추운 날씨 탓인지 당구장엔 손님이 없었다.

“저 지나가는 길인데, 포켓볼을 좀 치고 싶은데 상대가 되어줄 수 있을까요?”

청소를 어느 정도 마친 상태라 흔쾌히 승낙하면서, 내 딴에는 뭔가 잘난체를 하고 싶었던 것이었까? 그냥 초크칠만 하면 될 것을, 사포로 큐대를 문지르기도하고, 줄을 가지고 큐대 손질 후에 그녀 앞에 섰다.

“포켓볼은 좀 쳐보셨어요? “

라고 묻고는 속으로는

’ 오늘 운이 좋은거에요~ 제가 한수 가르쳐 드릴게요 ㅎ’

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첫게임에서 좀 많이 몰아치고 난 뒤에 그녀의 차례가 되었다. 몇 개의 공을 코너로 가까스로 넣더니, 몸이 풀렸는지 어려운 각도에서도 침착하게 공을 적중시켰다. ‘이거 바짝 긴장해서 쳐야겠는걸’이라고 생각했을 때엔 이미 첫 게임이 끝난 직후였다.

‘운이 좋은걸까’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두번째 게임에서 더욱 초라해졌다. 내 순서에는 이상하게도 각이 없는 포지션의 공을 처리하느라 맥을 못추는 동안 숨쉴 틈 없이 게임을 압도하고 지배했다. 순서가 그녀에게 돌아가는 순간, 그 게임은 지는 게임이 되었다. 그렇게 내리 다섯 판을 지고선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저 혹시…..”

“미안해요. 사실 저 프로선수에요. 지나가는 길에 몸좀 풀려고 왔어요. 기분 나쁜건 아니시죠? “

“네 그럴리가요……;;”

속으로 ‘어쩐지’를 외치면서도 한편으로는 1시간 전에 거들먹거리던 내 모습이 떠올라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따뜻한 원두커피를 한잔 대접하고 나서야, 그녀의 소속과 성적을 들을 수 있었고, 우린 어색하게도 한뼘 더 가까워져 있었다.

세상엔 참으로 많은 고수들이 살아간다. 특히 세상에 나서지 않고 제 실력을 숨긴 채 살아가는 절대고수들이 참으로 많다. 그 날 이후로 내가 강점이 있는 분야에서도 늘 겸손하려고 한다. 두 번 다시 쪽팔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하고, 실제로 완벽하지 않은 나를 돌아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인생은 늘 이렇게 작은 경험들을 통해 뜬금 없는 교훈을 전해준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문득 문득 내 앞을 스쳐간 수많은 고수들이 생각난다.


손병구 at 20:25